엉뚱하고 유쾌한 크라잉넛 다섯 남자들과의 인터뷰
- 2012년 작성한 <슈퍼컬처> 지면 기사에서 발췌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나의 첫 직장, 잡지사 <슈퍼컬처>. 처음이라는 설렘과 함께 참 다사다난했고 황망한 상황도 있긴 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 함께 했던 이들이 좋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때 매달 어렵다 어렵다 했던 게, 되돌아보면 그 시기에 잡지사가 어렵지 않기는 쉽지 않은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디지털 매거진이 되거나 결국 언젠가 폐간될 수밖에 없었을) 변혁의 시기라서였던 것 같다.
종이 잡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듯한 요즘. 그 시절에 남겨둔 이야기들만큼은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종이 위에 불변의 활자로 남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싶다. 물론 다시 돌아보니 그때 나눈 논의가 우스울 정도로 많이 세상이 바뀌어버린 부분도 있지만... 여하간 종이 지면에 묻혀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얘기들(노래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너무 유쾌하고 재밌는 그룹이라는 걸 알게 되는)이라, 인터넷상에 띄워두고 다시금 회자되길 바라며 지금 세상에 이 이야기들을 다시 옮겨두어 본다.
[록밴드 크라잉넛] 17살, 아직 꽃 같은 청춘.
20세기말 홍대 어귀의 소규모 펑크록 클럽 ‘Drug’이 잉태한 소년들은 세상으로 뛰쳐나와 ‘조선펑크’가 휘갈겨진 깃대를 세우고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는 발자국마다 대한민국이라는 불모지에 피어오르는 인디 록의 향연. 그렇게 달려온 지 어언 17년이다. 그리고 지금, 크라잉넛은 다시 짐을 꾸리고 있다. 그들이 향할 곳은 아직까지 미처 가닿지 못한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속. ‘아직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없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이, 현재가 가장 즐겁다.’는 17살의 크라잉넛. 회상하고 추억하기엔 새파랗게 이른, 아직 꽃 같은 청춘이다. /Editor_김선홍 Photographer_JayKay Suh
SUPERCULTURE(이하 슈)/박윤식 : 보컬(이하 박)/이상면 : 기타(이하 면)/ 한경록 : 베이스(이하 한)/이상혁 : 드럼(이하 혁)/김인수 : 키보드(이하 김)
슈 : 올해로 크라잉넛이 활동을 시작한 지 17년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감회가 어떠세요?
박 : 음악이 무르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웃음) 17년이 되었지만 아직 갈 길 이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슈 : 17년 동안 밴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요?
박 : 일단 모두 다 음악을 좋아하고요. 그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다 친구였기도 하고요. 심지어 저희는 군대도 동 기예요. (웃음)
혁 : 친구들이 어렸을 때부터 비슷하게 호기심이 많았죠.
면 : 저희가 처음 펑크 음악을 시작할 때 하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서로 커 가는 모습을 보았죠. 그런 부분이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인 것 같아요.
초딩 친구들 모여 '크라잉넛'이라 이름 지은 이유
슈 : 멤버들 모두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거예요?
박 : 네. 천륜이었던 것 같아요. 인수 형은 대학교 다닐 때 만났고요.
김 : 그때 전 DJ 알바를 하고 있었죠. 딱 CD 두 장만 놓고. (웃음)
슈 : 백번 받은 질문이겠지만 ‘크라잉넛’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왔나요? (웃음)
혁 : 에피소드가 있긴 있었죠. 재미는 없을 텐데...
박 : 또 얘기해야 하나...? (웃음)
한 : 60살까지 해야 돼. (웃음)
박 :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잔돈을 바꾸려고 호두과자를 샀는데, 사고 보니 이 게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버스 탈 돈이 없어서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버스 세 대를 놓쳐버렸어요. 그래서 ‘에이 씨X...’ 하고 그냥 걸어서 집에 갔죠. 그때는 저희 4명 말고도 3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호두과자 때문에 망했다!’ 그래서 짧은 영어로 ‘Crying nut’이 된 거예요. 사실 따지고 보면 울지도 않았고 너트도 아니었는데. (웃음)
슈 : 밴드의 근황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박 : 3월에 ‘서울소닉 북미 투어’를 다녀왔어요. 옐로우 몬스터즈와 3호선 버터플라이와 같이 갔죠. 7월에는 오키나와 페 스티벌에 초청돼서 오키나와에 가고 8월에는 일본 간사이 지역에 투어를 갈 예정이에요. 그리고 6집 낸 지도 꽤 돼서 7 집에 들어갈 노래를 작업하고 있는 중이기도 해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진심은 통했던 북미 투어
슈 : 북미 투어 때, 현장 분위기가 어땠나요?
박 : 일단 말이 안 통하니까 ‘영어 멘트를 잘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많이 했었죠.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까 그 그렇게까지 영어를 잘할 필요도 없더라고요. 한국말로 ‘말 달리자’를 노래해도 관객들이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저 친구들 지금 열심히 달리고 있구나’하고 느끼는 식이더라고요. 언어를 떠나서 느낌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던 거죠. 그 런 부분이 참 좋았어요.
혁 : 사실 미국에는 전에도 종종 갔었는데, 한인 사회나 페스티벌 초청이었죠. 이번 투어는 조금 달랐던 게 일정 중에 작 은 클럽 공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한국인들이 아니라 현지인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현지 밴드들과 함께 공연 을 했어요. 처음에는 기대 반 긴장 반으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가자마자 다 풀려버렸죠. 너무 재미있어서요. (웃음)
박 : 한국 음악은 K-POP이 주로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록 음악은 다른 나라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아무래도 ‘록 음악으로 해외에 진출하기에는 벽이 높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 록 음악도 해외에서 승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온 것 같아요. 웬만한 록 음악은 다 들어봤을 그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해 주는 것을 보면서요.
슈 : 북미 투어에 함께한 팀들 간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혁 : 함께 간 인원들을 다 합치면 거의 20명 정도 되는데, 투어 중에 2인실씩 빌려서 자기엔 숙박비가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어딜 가든 거의 이층집 같은 곳들을 통째로 빌려서 숙박하는 식이었죠. 그게 더 저렴한 편이라. 그 밤들 내내 바 비큐 파티를 한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웃음)
면 : 예전부터 세 팀이 다 친했는데 한동안은 각자의 길을 걷느라 자주 보진 못했었거든요. 이번 투어가 서로 간에 우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더 기분이 좋았어요.
슈 :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함께한 <개구쟁이> 앨범은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되었나요?
혁 : 지난해에는 ‘다이나마이트 투어’라는 이름으로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옐로우 몬스터즈, 저희 이렇게 세 팀이 지역 클럽을 순회하는 공연을 했거든요. 주 중 공연이라 관객이 많이 들 거라 기대는 안 했는데 의외로 정말 많은 분이 공연에 와줬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재미있었고, ‘이거 괜찮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지막 공연이 제주도였는데, 예정되었던 공연이 모두 끝나고 술을 마시던 참에 ‘우리 같이 앨범을 한번 내보자’ 하고 얘기가 나었죠. 마침 갤럭시 익스프레스도 녹음해 둔 곡들이 몇 곡 있었고, 저희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뒤로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앨범이 나올 수 있었죠.
'알아서들 잘 즐기는' 페스티벌 속 관객들과의 찰떡 호흡
슈 : 지난 5월까지 대학에서 축제 공연을 많이 했잖아요. 학생들 분위기는 어땠나요? 학생들이 취업 준비에 많이 찌들 어 있지는 않았나요?
면 : 예나 지금이나 노는 건 다 잘 노는 것 같아요. 어쩌면 오히려 지금이 좀 더 잘 노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렇게 말하 면 좀 편파적일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대학교마다 노는 분위기가 다 달랐거든요. 특히 서울 근교 같은 경우에는 호응이 많은 편인데, 지방으로 갈수록 조용한 편이었어요. 이제는 그런 차이가 거의 없어진 것 같아요. 또 아이돌이야 워낙에 대 중매체에서 많이 접하기 때문에 축제에 오는 게 신기하면서도 익숙한 일인데, 록 밴드 같은 경우에는 일단 모르는 밴드들이 되게 많거든요. 그래도 일단 음악이 나오면 ‘뭔가 새로운 거구나.’ 하면서 받아들이고 즐기는 모습이 좋았어요. 예전보다 좀 더 능동적으로 노는 분위기랄까? 어떤 학교에서는 학생회장이 ‘우리 신나게 놀아보자. 대학에 오느라고 입시에 찌들었는데 여기 와서까지 취직 생각에 찌들어야 되겠느냐. 좀 즐길 줄 아는 대학생이 되자!’ 하면서 격려를 하는데, 그 모습도 굉장히 와닿더라고요.
혁 : 오히려 학생들은 더 잘 놀려고 그러는데, 역시 학교나 사회제도가 못 따라가는 느낌이 들어요. 숨통을 너무 조여 놓는 것 같아요.
김 : 또 한 가지 변화는... 주점의 메뉴가 많이 바뀌었어요. (웃음) 저희 때는 떡볶이, 김치찌개, 빈대떡 같은 게 전부였는 데 이번에 갔더니 양꼬치도 팔고, 피자도 팔고. 술도 막걸리, 소주, 맥주만 파는 게 아니라 칵테일, 예거 밤, 크랜베리 보 드카까지 있었어요. ‘세계로 가는 대학 문화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죠. (웃음)
면 : 학생 밴드들의 실력도 참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정말 잘하더라고요. 대학생들 스스로 노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같 아요. (웃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교 록 밴드 동아리들은 맨날 ‘She’s Gone’만 부르고, Skid Row나 Muse를 카피하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Jason Mraz 노래도 하고 어떤 팀은 김광석 노래도 멋들어지게 하더라고요. 반가웠어요.
슈 : 특히 기억에 남는 학교가 있나요?
일동 : 한양대? 포항공대? 마지막에 갔던 학교가 어디더라... 아, 오산에 한신대학교!
박 : 한신대학교 같은 경우 요즘 많은 대학이 기업들로부터 스폰서를 받아서 무대도 엄청 크게 짓고, 맥주 판도 곳곳에 벌 이는 식인데 거긴 진짜 학교 앞 분식집 스폰서들만 쫙 서 있는 거예요. 거기에서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죠. 기업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아이돌들을 꼭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면 : 물론 학생들이 축제를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을 학생회비로만 충당하는 게 아니라 기업으로부터 받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더욱 즐거운 축제를 만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죠.
박 : 거기에 더불어... 학생들이 크라잉넛 같은 ‘좋은 팀’들을 좀 더 많이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이돌도 좋지만 같은 청년들끼리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좋잖아요. 좋은 인디 팀들이 많으니까 좀 더 다양하게 갔으면 좋겠어요.
슈 : 지난 5월에 열린 ‘Green Plugged Festival’은 어땠나요? 크라잉넛이 나 왔을 때 관객 반응이 특히 열광적이었다고 들었어요.
박 : 저희가 나름 플레이리스트를 바꿔서 첫 곡을 ‘말 달리자’로 했더니... 난리 가 난 거예요. (웃음) 저희끼리는 공연 순서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한바탕 난리 부르스가 나기도 했죠. (웃음)
혁 : 행사장이 둔치였는데 사는 곳이랑 가깝다 보니 편한 마음으로 간 것 도 있어요.
김 : 분위기는 작년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관객들 액션이 많이 늘었더라고요. 서클 핏도 두세 군데 생기고 모싱도 하고. 작년까진 그런 모습은 잘 못 봤거든요. 전 같으면 ‘월 오브 데스’(록 공연 중 관객들이 하는 퍼포먼스의 일종) 같은 걸 시켜도 시원찮았는데, 이제는 알아서들 열심히 즐기는 모 습이었어요. 혁 : 야자나무 둘레를 사자와 호랑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 듯이... (웃음) 1 년 사이에 참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죠. 페스티벌이 점점 하나의 문화로 자 리 잡아가는 것 같아요.
낭만이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 속, 그들만의 낭만적 작곡
슈 : 크라잉넛의 곡들은 주로 어떤 순간에 만들어지나요?
혁 : 노래마다 만들어지는 계기는 다 달랐어요. 합주할 때 갑자기 생각나서 즉흥적으로 만들 때도 있고, 각자 집에서 자다가 갑자기 뭔가가 퍼뜩 떠올 라서 대충 1절 정도 만들어두고 여기 와서 불러보면서 서로 살을 붙이는 식 일 때도 있죠.
슈 : 곡의 가사들이 참 탁월해요. 시적이고 낭만적이고, 때론 철학적이기도 하고요.
김 : 꽃과 달, 새가 많이 등장을 하지요. (웃음) 멜로디를 만들 때는 대충 중얼중얼 방언을 붙여서 만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생각이 가사로 담기고 나면 멜로디 붙이기도 좋고, 스타일을 맞추기도 수월하죠. 그러다 보니 가사를 우선시하는 면도 조금 있어요.
혁 : ‘나는 자유롭게 살 테야.’식의 오그라드는 가사는 다들 좀 싫어하는 편이 라서요. 왜, 좀 뻔한 가사들이 많잖아요. 그런 닭살스러운 걸 다 싫어해요. 뻔히 보이는 진지함보다는 한 번쯤 꼬아주는 그런 유머러스한 게 좋아요. 그러 려고 노력하고요.
박 : ‘넌 내게 반했어’ 이런 거...? (웃음)
면 : ‘마법에 성’ 이런 거...? (웃음)
한 : 요즘은 뭐랄까... ‘낭만’ 자체도 일종의 반항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입시를 위해 살아야 하고, 대학에 가도 취직 관문에서 살아남아야 하죠. 그러다 보니 낭만은 어찌 보면 사치일 수도 있어요. 할 일들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정말 숨통을 막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우린 ‘한번 사치를 부려보자.’라고 생각하는 면들이 있어요. 가사에 담긴 유머와 풍자도 각박 한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고요.
슈 : 낭만이 사치가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참 와닿네요.
김 :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요. 핸드폰을 사도 6개월을 못 가고. 1, 2년쯤 쓴 것은 모두 빈티지 취급을 받고. 다들 너무 빨리 앞으로 뛰어나가죠. 그걸 조금 쉬면서 바라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와 재미가 있는 일인데 그런 사람들을 ‘ 낙오자’라고 가르치니까. 정말 좋지 않은 일이죠.
박 : 노래들도 너무 인스턴트 같아요. 요즘 노래들을 들어보면 ‘날 너에게 주겠어. 너만을 사랑해.’라고 하다가 이내 ‘꺼져버려. 널 차버리겠어’ 하는 식의 노래가 많은 것 같아요.
혁 : 멋있네요. 2초 만에. (웃음)
박 : (웃음)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노래의 수명도 너무 인스턴트 같고요... 저희는 좀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노래를 하고 싶어요.
면 : 요새는 또 워낙에 인터넷이 발전해서 서로가 서로의 족쇄가 되어 서로 를 비판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장근석이 블로그에 글을 올렸는데 그걸 두고 너무 많은 사람이 입을 대는 거예요. ‘허세 작렬!’이라고. 소통을 하고자 하는 건 중요하지만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 같아요. ‘나는 너와 달라.’가 아니라 ‘다르니까 넌 안 돼!’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요. 그런 부분도 가사에 좀 녹여내고 싶은데... 가사라는 건 역시 어려운 것 같아요. (웃음)
슈 : 6집 <불편한 파티>를 준비할 때부턴 연습실에 녹음실을 마련한 걸로 알 고 있어요. 뿌듯했을 것 같아요.
한 : 도전이었죠. 어려운 부분도 많았고요. 그것 때문에 따로 공부를 열심히 한 멤버도 있어요. 톤 잡는 것부터 하나하나다 쉽지는 않았죠. 그런데 결과물이 나온 걸 보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뿌듯함이 있는 거예요. ‘아... 우리가 진짜 인디를 했구나...’ 하고.
혁 : 지금 이 연습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쓰레기장처럼 보여도... (웃음) 연습실 장비 하나하나 저희가 엄청 고심해서 고른 거거든요. 가격 대비 성능을 따져서 하나하나 모으는 뿌듯함이 또 있었죠.
슈 : 1집 로 활동하던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면 : 일단 악기도 좋아지고 음악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좋아졌고 실력도 좀 더 나아진 것 같아요. 앨범이 꽤 쌓이다 보니 어딜 가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변화인 것 같고요. 그런 건 참 많이 변한 것 같은데, 공연할 때의 설렘에 있어서는 전혀 변함이 없어요. 관중 서너 명 앞에서 공연했을 때나 지금이나.
혁 : 요즘도 클럽에서 공연을 자주 하는데요. 저희도 변했지만 홍대 언더그라운드 신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좀 더 발전하고, 재미있는 소스도 많아지고. 클럽도 훨씬 많아졌고요.
면 : 애송이였죠. (일동 웃음)
박 : 첫 앨범 나왔을 때는 음악 하는 형들마저도 ‘이게 뭐야. 그냥 관둬!’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새로운 스타일이다 보니까 듣는 사람들도 주로 마니아층었고요. 공연장에 직접 CD를 들고 다니면서 팔았어요. 지금은 어딜 가더라도 저희가 어떤 팀인지 정도는 알잖아요. 아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거. 그게 제일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혁 : 옛날에 애송이였다면 지금은 어른 송이... (웃음)
박 : 초코송이.
혁 : 새송이. (웃음)
1세대 펑크 록 밴드의 그 시절 홍대 비하인드 스토리
슈 : (웃음) 1세대 펑크 록 밴드들의 주 무대였던, ‘Drug’은 어떤 곳이었나요?
혁 : 지옥이었죠. 1994년에 문을 열었던...
면 : 조명도 없고 있는 것마저도 다 부서져 있는... 거의 쓰레기통이었죠.
혁 : 나무 널빤지 밑에는 시체가 숨겨져 있고... (웃음)
면 : 나무 바닥 중간중간이 빠개져 있었는데, 그걸 들어내니 거기서 팔뚝만 한 뼈가 나온 거예요. ‘이야... 이것은 인간의 정강이뼈가 아닌가!’ 정말 난리가 났었죠. 냄새도 시체 냄새 같은 거예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족발이었어요. 어떤 녀석이 술안주로 먹고는 거기다가 쑤셔 넣은 거예요. (웃음)
슈 :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이들 중에는 어떤 분들이 있었나요?
혁 : 코코어, 노브레인, 레이지 본, 쟈니 로얄, 로켓 다이어리... 그런 팀들이 있었죠. 후반기에는 옐로우 몬스터즈 멤버 중 몇몇도 있었고요... 델리스파이스도 드럭의 하우스 밴드는 아니었지만 드럭에서 공연을 자주 했어요. 언니네 이발관 도 자주 공연 했었고.
박 : 굉장히 좁고, 더럽고 지저분한 공간이었지만 저희가 처음 공연을 할 수 있었던 무대이기도 하고요, 젊은 사람들이 다 같이 슬램을 할 수 있는 그런 탈출구이자 해방구였어요.
혁 : 한국의 펑크 신이 거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과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거기밖에 없었거든요. 최초이자, 게토였다고 할까요.
박 : 음악평론가 김작가도 거기서 유명해졌죠.
면 : 김작가는 맨날 와서 자기가 ‘홍대 자라투스트라’라고 엄청 잘난 척했죠. (웃음)
혁 : 불대가리(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는 드럭에서 일하는, 청소하는 애였어요. (웃음)
슈 : 드럭은 언제 문을 닫았죠? 이제 ‘Drug’을 대체할 만한 곳은 없는 건가요?
혁 : 2003년에 저희가 군대 갈 때쯤에 드럭 사장님이 그곳을 스컹크 레이블에 넘기고, 다른 곳에 ‘DGBD’라는 클럽을 차 렸어요. ‘Drug and blue devil’이라는 뜻인데 뉴욕의 클럽 ’CGBG’를 표방한 거죠. 그런데 사장님이 운영을 잘 못해요. 그 래서 결국 또 말아먹고. (웃음) 그래도 DGBD는 아직 남아 있어요. 다른 분들이 와서 잘 살려 놓았어요.
슈 : 거기서 새로운 밴드들이 활동을 하기도 하는 건가요?
혁 : 새로운 밴드들도 있지만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는 밴드들도 거기서 공연을 많이 해요.
면 : 지금은 밴드들이 열정을 다양한 곳에서 펼칠 수 있게 된 면도 있어요. 예전에는 특정 클럽으로 몰리는 성향이 있었 는데, 이제는 좀 흩어졌다고 할 수 있죠. 바다비, 빵, 스팟, 사운드홀릭 등의 클럽이 홍대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어요.
박 : 지금이 번영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홍대의 많은 클럽이 밴드들을 키우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같이 커가고 있는 것 같아요.
슈 : 혹시 크라잉넛이 보낸 17년의 세월 중 되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나요?
혁 : 늙어서 한 100세 정도 되면 돌아가고 싶어요... (웃음)
한 :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결론은 ‘지겨울 것 같다’ 예요. 똑같이 두 번 살면 지겹지 않을까 요. 지금이 여전히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혁 : 옛날로 돌아가면... 군대를 또 가야 되잖아요. 그게 정말 싫어요.
면 : 그럼 전역하는 날로 돌아가면 되겠다. (웃음)
박 : 얼굴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웃음) 늘 흥미진진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김 : 옛날 영화 중에 결혼을 해서 생활에 절은 아줌마가 타임 슬립을 해서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내용의 영화가 있어 요. 거기에서 아줌마가 훗날 성공하게 되는 킹카와 지금 결혼을 한 남자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데 결국 현재의 남자를 다시 선택한다는 내용이죠. 왠지 저희도 똑같을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가도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 같아요.
박 : 예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주식 투자나 해볼까... (웃음)
김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로또 번호나 좀 외워두었으면!
혁 :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시점에서 미래가 재조합돼서 맞지 않을 거 야 아마.
김 : 역사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너는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선택을 하게 돼 있어.
혁 : 파란 화면 다음까지는 돌아가고 싶어. 천리안, 하이텔, 다음, 나우누리.
박 : 맞아. MP3가 나오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는 음반이 호황이었거든.
면 : 그래도 행사는 지금이 많잖아. (웃음)
혁 :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 대통령이 되자. (웃음)
슈 : 요즘 멤버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슈가 있나요?
면 : 녹음실 대청소? 다음 주부터 7집 녹음에 들어가요. 분위기를 좀 신선하 게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있죠. 그래서 일단 공사를 좀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박 : 요즘 우리의 핫이슈는 오디션 프로그램 아닐까?
TV 오디션에서 만나는 동료 밴드들에 대한 감회...
슈 : 오디션 프로그램, 자주 챙겨 보세요?
일동 : 그렇게 챙겨 보지는 않는 편이긴 한데.
김 : 를 보는 순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처음부터 끝까지 웃게 돼요. 이유는 상세히 말하지 않을게요. (웃음)
박 : 다 아는 사람들이라... (웃음)
슈 : 얼마 전엔 국카스텐이 <나가수>에서 ‘한잔의 추억’으로 기립 박수를 받기 도 했죠. 밴드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인디 록 밴드들을 대중화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이에 대한 크라잉넛의 생각은 어떤가요?
면 : 도움이 되긴 되는 것 같아요.
박 : 국카스텐한테는 당장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웃음)
면 : 어차피 나중에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또 분류가 되겠죠. 생각지도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대중들에게 자신들을 알리는 길이 쉽게 열린다고는 해도 결국은 거기서 또 경쟁을 해야 하니까.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요. 차라 리 처음부터 어렵게라도 스스로 길을 개척한 밴드들이 장기적으로 좀 더 입 지가 탄탄해지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 밴드들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몫인 것 같아요.
박 : 국카스텐은 원래부터 실력이 있는 밴드였어요. 방송에서 사람들이 딱 원 하던 모습을 보여줬던 거죠. 받아야 할 만큼의 인정을 좀 더 넓은 데서 받았다고 할까요.
한 : <나가수>나 같은 프로그램 자체를 비방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거기에 어울릴 만한 팀들이 있고, 기량을 좀 더 뽐내보고자 하는 성향의 팀들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만 음악에 가창력과 테크닉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좋고, 고음이 잘 나온다고 듣기 좋은 음악은 아닌데, 그런 틀로 실력을 판단하는 식이 되니까. 그런 부분에서 밴드들이 좀 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거기에서 떨어진다고,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라 할지 라도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가 아니니까.
혁 : 시청자나 여론이 밴드들을 너무 자로 재듯이 평가하는 게 보기 불편해요. 저희끼린 ‘우린 저기 나가봤자 예선에서 떨어질 거다.’라고 그래요. (웃음)
면 :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1~2년 전에 영국이나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시들하거든요. 우리도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혁 : 과거에 록 음악이 점점 메인스트림화되고 Pink Floyd처럼 거대해지면서 기업처럼 움직이던 때가 있었어요. 그에 대한 반항으로 펑크가 출발을 했죠. 그게 하나의 문화가 되었고, 지금도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이 다 그때 문화를 담고 있어요. 어떤 것이든 문화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잘하고 크고 멋진 것만 좋은 건 아니란 거죠.
김 : 시스템적인 면에서 그런 건 있어요. 가요 프로그램에서 제일 하위권인 아이돌도 홍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디 밴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알아요. 그러 니 다들 일단 한번 찍고 가고 싶단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우리끼리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할지는 아직 생각을 못 해봤어요. 큰 골자는 그리 쉽게 변하진 않을 것 같아요.
혁 : ‘전국 비둘기 연합’(이하 전비연)이란 2인조 밴드가 있는데, 밴드 생활을 굉장히 오래 한 연륜 있는 친구들이에요. 얼마 전에 ‘Toxic’이라는 밴드가 TV에 출연했잖아요. 물론 그 밴드도 실력이 좋지만, 어느 날 두 밴드가 같이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엄청 사람이 많이 몰린 거예요. 다 Toxic 때문이었죠. 둘이 스타일이 비슷한데, 그게 유럽에서 인기 있는 스타일이라고는 하지 만, 전비연이 먼저 시도한 거거든요. 그런데 Toxic의 팬들이 전비연의 노래는 전혀 몰라도 Toxic 노랜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을 했다고 해요. 팬들 사이에 ‘전비연이 우리 Toxic 오빠들 너무 따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자자했다는... (웃음)
슈 : 그래도 크라잉넛이 <나가수>에 나오길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웃음)
김 : 뭔 그런 기대를 하고 그래. (웃음)
혁 : 저도 처갓집에 가면 장인어른이나 장모님께서 늘 저기 안 나가냐고 그러세요.
한 : 미용실에서 머리 자를 때도 그러고.
면 : 아우, 근데 방송의 생리랑 저희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혁 : 방송에 나가면 말을 잘 못하겠어요... (웃음)
김 : 국카스텐이 출연했을 때가 두 주 전이죠?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갔는데, 한의사랑 대화를 했어요. ‘국카스텐 알아요? 예. 친해요? 예. 야야 알아요? 예. 친해요? 예’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어요. 그때 밴드의 밝은 면은 국카스텐, 어두운 면은 야야였잖아요. (웃음) 어쨌든 사람들이 TV를 통해서 그 두 팀을 기억하는 거니까 참 재밌죠.
슈 : 크라잉넛의 7집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혁 : 올해 안에 나오는 걸 목표로! 저희가 작년에도 올해 안에 낸다고 그랬었거든요.
김 : 한국은 전통적으로 음력을 세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달력으로 구정 전까지... (웃음)
'잣 같은' 밴드로 남고 싶다는 유쾌한 포부
슈 : 마지막으로 어떤 밴드로 남고 싶으세요?
혁 : 저희가 땅콩 같은 견과류니까... ‘잣’ 같은 밴드? (일동 웃음)
면 : 계속 라이브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김 : 음...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저 계속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요.
박 : 아까 말했듯이 ‘널 차버리겠어!’ 이런 노래보다는 (웃음) 화려하진 않지만 와닿는 노래들로 사람들과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밴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한 : 특별하진 않지만 특별한... (웃음) 기억에 남을 만한 밴드.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저희도 죽어서 가죽을 남기겠습니다.
김 : (이상혁의 문신을 가리키며) 가죽에 이렇게 색깔을 칠하고요.
혁 : 죽어서 한 장의 가죽점퍼가 되겠습니다. (일동 웃음)
박 : 그거 좋은데 오래가
겠다.
한 : 인간 보호 협회에서 말이 나올 수 있는 밴드가 되겠습니다. (웃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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